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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4대구강의18(교회를넘어서)09-새언약7(에스겔)1자유게시판에스겔

04대구강의18(교회를넘어서)09-새언약7(에스겔)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4 대구강의 18] - 교회를 넘어서 9 - 새 언약(에스겔) 7

04,10,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거룩의 넘침'에 대해서 !!

오늘은 교재 '교회를 넘어서' 257페이지부터 보자.

** 새 성전에서의 넘침은 거룩의 넘침이다. 따라서 이 거룩으로 인해서 새 성전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 안에서는 그 누구도 이 거룩 앞에서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보면 '거룩의 넘침' 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생각보다는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를,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곧바로 온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율법의 방향이 이렇게 장래의 어떤 사건을 겨냥하면서, 이렇게 나아간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하라' 라는 것이니, 여기에 이렇게 '나' 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율법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한 규칙을 두고서 율법이라고 보는 것이지, 이 율법이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된다고, 그것이 주류라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율법은, 인간이 아닌 십자가를 겨냥 !!

율법의 원래 취지는 십자가를 겨냥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율법을 인간들이 마치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끌어당기게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고 하니까, 사실은 이 십자가가 거룩의 전부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데 평소에 이 율법이 인간의 무엇을 지적하는고 하니, 인간의 죄를 지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 즉 최고의 율법이 무엇인고 하니, 즉 거룩의 절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그 율법이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자청년의 경우에 "저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그렇게 반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율법이 우리 인간들하고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의 지향점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과연 그 십자가 앞에서도 반발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말라" 라는 것과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율법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자기는 마음속으로 간음을 하지 않고 형제도 미워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마음속으로 간음도 하고 형제도 미워한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 십자가 앞에서 의로울 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이 두 가지 율법을 지킨 것이 되는가?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 마음의 감정을 파악해서, 나중에도 몰라도 아무튼 지금은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 율법은 자기하고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십자가 앞에서 누가 의로울 자가 있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인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도 의로울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이 두 가지는 자기가 그래도 잘 지키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십자가 앞에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모두가 다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는 결코 그렇게 비참하게 깨어지는 것은 싫어한다는 말이다.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자기 죄 때문에 자기를 대신해서 누군가가 달려서 죽은 사형틀인데, 그러니 그분의 죽음은 곧 자기의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가 죄인이고, 당연히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심리적 상태는 무엇인가?

◈ '나'는 약간의 죄인 ??

자기는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고, 약간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킨 것도 있고, 덜 지킨 것도 있고, 못 지킨 것도 있으니 말이다. 또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도 있고, 잘만 하면 지킬 수 있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율법을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래서 이렇게 잘못된 심리상태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나쁜 짓을 많이 한 강도보다는 자기가 조금은 낫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둘 다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장래에 십자가 앞에서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미리 앞당겨서, 2004년 10월 지금 이 순간에 느끼자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느껴지는가? 결코 느껴지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느껴지지 않는 잘못된 우리의 심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 성화론 - 작년보다는 지금이 !!

성화론이 무엇인가? 작년보다는 지금이 낫다는 의미인데, 즉 예수를 믿기 이전보다는 지금이 낫다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의 책 중에서 '하나님의 열심' 다음으로 나온,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이 있는데, 책 내용은 고사하더라도 그 제목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과 '이후' 라는 것은 서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는 이후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시간적 요소를 모두 박살내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말이다. 물론 그렇게 서로가 맞지 않다는 차원에서 책제목을 붙였다면 몰라도, 물론 그럴 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 구원의 결정은 십자가에서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박영선 목사는 "구원이 왜 시간적 요소가 없는가? 분명히 있다" 라고 주장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왜 잘못인고 하니, 지금 이 시점에서 구원을 따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게 되면, 구원의 근거가 불확실해진다는 말이다. 즉 성경말씀을 몇 개 지켰다고 해서 자기가 구원이 된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원은 어디에서 결정이 나는가? 바로 십자가 앞에서 결정이 된다는 말이다. 즉 "아하, 저렇게 달리신 분이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하신 분이구나" 라고 하는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비로소 이 십자가의 제대로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과연 십자가에서 폭발해서 튀어나온 것은?

그런데 이 십자가는 모든 시간개념을 마치 블랙홀처럼 다 흡수해버리는데, 그렇게 모아서 당겨버리면 그 안에는 그 어떤 형체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그런 모든 것을 다 함몰시키고 빨아 당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남아 남지를 않는데, 그렇다면 구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폭발을 시키고 다시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모든 것을 다 집어넣는데, "모든 것은 다 죄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 모든 것이 다 죄인가? 그것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아담 속에 있는 우리는 모두 다 죄인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다같이 아담 안에 있으면서, 강도하고 자기하고 누가 더 나은지 우열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이냐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는 분명히 말이 안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 느낌상 말이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모든 인간들을 몽땅 죄인으로 집어넣는데, 잘난 놈이든, 못난 놈이든 간에, 의사든, 검사든, 판사든, 먹사(?)든 간에 말이다.

◈ 십자가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의'만 !!

그렇다고 하면 구원이 된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은 개인에게 물을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무엇이 폭발을 하면서 다시 튀어나오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그때 튀어나오는 것이 오직 '예수님의 의' 뿐인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고 적용이 되는데, 그러니 성도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이 튀어나왔다는 말은, 도대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그 구원의 근거를 어느 시점에서 잡았느냐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자기는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는 말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마 지금 사도바울이 자기 신분을 숨기고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지 싶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도 있는데, 부활도 있고, 전도도 있고, 봉사도 있다" 라는 소리를 마구 들으면서 말이다. 요즘 이런 주장을 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 다시, 십자가에서 튀어나온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사도바울이 이렇게 "십자가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들을 꾀더냐?" 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치 마그마가 폭발이 되어서 화산에서 분출하듯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튀어나온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옛 언약이 들어가서, 새 언약이 !!

이 십자가에서 새로운 율법이 튀어나오는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이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십자가에 다 집어넣어서, 그렇게 넣은 것이 옛 언약이고 말이다. 그렇게 옛 언약이 들어가서 새 언약이 튀어나오는데, 그러한 행위의 주체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이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주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십자가에서 나올 때 성령이 더불어 나오고, 그 성령은 십자가에서 폭발된 것을 가지고, "저는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술을 끊었습니다" 라고 하는 시간적 공간적 요소를, 시시때때로 그것이 잘못이라고 성령께서 책망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책망을 한다는 말이다.

◈ '부활' 이라는 기재(器材)를 통해서 !!

그러니 시간이든 공간이든 간에 십자가에서는 다 함몰이 되어서,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다시 폭발이 되는데, 즉 '부활' 이라는 기재(器材, 시스템?)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폭발이 되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잘남을 인하여 죽었던 분으로서 우리에게 소개가 되고, 또한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처음부터 죽었어야만 했다" 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어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어머님, 어찌하여 저를 낳으셨나이까 ??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들 가운데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부모를 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하여 저를 낳으셨나이까?" 라고 말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이 놈아, 나가 죽어라" 라고 하면서 왜 자기를 만들기는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시간과 공간성에 사로잡혀있는 한 이것이 설명되지 않는데, 왜 그런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안경이 있는데, 그런데 이 안경이 사람들이 자기를 만들어놓고는 '안경' 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분이 나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를 안경이 아니라, 그만 '만년필'로 불러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딸이 하는 말이 "엄마, 나는 이제 아들이 되고 싶어" 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안경이 자기가 만년필로 불러달라고 그렇게 우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누군가가 자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안경이 싫고, 만년필이 되고 싶어" 라는 소리가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소리는 누구의 권한인가? 자기의 권한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자기를 만들어준 분의 덕택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인간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

그러니 자식이 되어서 부모에게 "왜 저를 낳았습니까?"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 입과 혀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 덕분이 그런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왜 저를 만들었습니까?" 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데, 그렇게 만들어준 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라도 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 십자가는, 모든 것이 다 죄이고 은혜임을 !!

이것이 바로 '은혜' 인데, 그렇다면 십자가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죽여버리는 것인데, 즉 자기에는 그 어떤 주장과 권한도 없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십자가는 저주를 받는 것이니 말이다. 그 무슨 짓을 해도, 즉 설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해도, 모든 것이 다 '죄'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는 사람은, "내가 전도를 열심히 해서, 기도를 열심히 해서, 헌금을 열심히 해서" 라는 소리를 일체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는가? 결코 자기의 기도나 전도의 열심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바로 예수님 덕분에 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의 특징이란 말이다.

◈ 이근호 목사, 당신은 왜 ??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봐요, 이근호 목사. 당신은 왜 전도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하는 모든 것을 것을 죄라고 말하는가? 그렇게 되면 교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대답을 하는고 하니, "그렇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죄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시비를 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에게는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전혀 십자가 안이 있지 않으면서, 즉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다.

이근호를 공격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인데, 그렇게 함으로 자기들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음이 다 드러났는데,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알미니안주의자' 라고 공격을 받으니, 그런 것은 숨기려고 하는데, 그래서 개혁주의니, 정통주의니, 칼빈주의니, 그렇게 위장을 하지만 말이다.

물론 칼빈주의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자기들은 전혀 믿음이 없으면서도, 하지만 믿음이 없는 것이 드러나면 불안하니, 또 구원은 받아야 하겠고 말이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행함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 로이드 존스 - '예수님의 의'의 넘침 !!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교재 257페이지에 보면, "새 성전에서의 넘침은 거룩의 넘침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로마서 강해'에서, 성전의 거룩 대신에 "예수님의 의의 넘침" 이라고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목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는데, 즉 예수님의 의가 흐르고 차고 넘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에스겔에서 이 성전은 '넘침의 장소' 인데, 그 이전까지는 넘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해준 대로 받아먹기만 삼키기만 했는데 말이다. 즉 제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일년 동안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7월 10일 대속죄일에 제사를 드리고, 그 다음 해에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작살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 성전은 인간이 먹여주는 대로 삼키고, 그것으로만 복을 주면서 유지가 된다는 말이다.

◈ 이제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어서 !!

그런데 에스겔에서 예언된 새 성전은 무엇인고 하니,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아도 거기에서 자생적으로 흐르고 넘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새 성전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왕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왕은 인간에게서 나온 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왕이 되셔서 제사를 드려서 나오게 되는 것이 바로 넘침인데, 그러니 이 넘침은 거룩의 넘침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코 인간의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자체의 능력인데, 이것을 에스겔 17장(37장?)에서는 '새 언약(영원한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의 특징은 인간은 배제해버리는데,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되지도 않으니 말이다.

(겔 37: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겔 37: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겔 37: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겔 37: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오시는 왕 !!

그런데 그렇게 인간을 배제하게 되면 제대로 된 왕이 있어야 하는데, 그 왕은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오시는 왕이란 것이다. 그 왕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체결에 의해서 거룩의 넘침, 또는 성령의 넘침, 또는 생명의 넘침으로 성전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그러한 성전으로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스겔에서 이야기하는 새 성전인데, 그런데 이것을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이제는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고 !!

그렇다면 어느 정도 넘치는가? 아예 마르는 샘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도 역시 우리가 일부러 퍼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마구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즉 "성령아, 제발 좀 나오너라" 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고 있고,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수시로 한결같이 데리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새 성전에 소속된 성도는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이 행함이 어떻게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즉 성도가 된 자의 모든 행함에는 이제 하나님의 용서하심도 같이 동행하고 붙어 다닌다는 것이다.

◈ 주님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 !!

어제 낮 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즉 "주님은 모질게 맞았는데, 그런 모질게 맞은 주님과 같이 붙어있는 사람이 곧 신앙인이고 믿음이 있는 자이다" 라고 말이다. "주님은 맞으세요. 저는 갈랍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성도라고 하면, 그렇게 예수님이 맞는 그 아픔이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 '용서' 라는 이름의 채찍으로 !!

그러면 이제 주님은 우리를 때리시는데, 과연 무엇으로 때리는가? '용서' 라는 채찍으로서 때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책망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용서를 하려고 하면 먼저 책망을 하고 나서 용서를 하는데, 즉 그렇게 책망하고 용서하고, 책망하고 용서하고, 그런 일을 하시면서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만 자기가 잘났다고 해버리면, 주님의 용서하심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데, 왜 그런가? 구원, 그 이후에 자기가 그만 잘나버리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도 내가 예수님을 믿고 많이 좋아졌는데" 라고 하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되는데, 즉 블랙홀이 어디서 폭발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서 몰리고, 어디에서 집중이 되고, 또한 무엇이 터져 나오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257페이지를 보자.

** 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심지어 왕마저도 없어서 황량한 심판의 정경들만 보여지는 가운데서도 새 성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전혀 안 되는데, '예스' !!

왜 이렇게 되는가? 백성들도 사기가 떨어지고, 모든 것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 무슨 새 성전이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인간들이 "이제는 끝났다. 절망이다. 우리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시점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묵묵히 자기 할 도리를 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모든 '예'가 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니오'가 아니고 말이다.

(고후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새 성전의 핵으로 등장한 인물이라고는 오직 '인자' 라고 불리는 에스겔뿐이다.

◈ 인자는 오직 '에스겔' 뿐 !!

왜 에스겔뿐인가? 그 당시에는 오직 에스겔만이 성신과 함께 있지,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에스겔만이 성신의 붙들림으로 이리 저리 옮겨 다녔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에스겔을 뭐라고 부르는가? "인자야!"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렇게 '인자' 라고 부르면서 온갖 것을 다 보게 하시고, 또한 온갖 수모도 다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두 다 이루려고 오신 분이니, 구약의 에스겔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이루어야만 하는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두고 '인자' 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 라고 함으로서, 옛날에 누가 '인자' 라고 불렸던가를 다시금 기억나게 하는데, 바로 그 자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에 에스겔에게 주었던 그 말씀의 성취자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인가? 그분만이 하나님의 기쁘심을 입은 아들이기에 말이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 있어서, 주인이 농부들에게 종을 보내었는데, 그런데 보내는 자마다 그 악한 농부들이 때리고 애를 먹였는데,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내었는데, 그 아들마저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그 아들만 죽이면 자기들의 포도원이 될 줄 알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주인이 그 농부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 아들이 선지자들과 동일한 목적으로 !!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무엇인고 하니까, 구약에서 아들보다 먼저 왔던 선지자들의 목적과 아들의 목적이 과연 다르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노선에서, 즉 같은 맥락에서 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를 핍박했던 그들이 과연 동일한 목적으로 들이닥친 아들을 핍박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아들도 핍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아들 이후에, 그 아들을 통해서 보냄을 받은 성도들도 역시 똑같은 취지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나를 인하여 욕을 듣고, 핍박을 받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들을 때는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고,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성도는, 예수님과 똑같은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

그렇게 예수님과 동일한 취지로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데, 그래도 성도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것은 '완벽해라' 라는 소리가 전혀 아니라, 예수님과 똑같은 의식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하고, 이 세상을 그런 눈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내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아하, 이제는 보이지 않는 주님이 성령을 자생적으로 발생하도록 하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냐는 것이다.

◈ 인자와 성전이 결합된 것이, 곧 예수님의 공생애 !!

이제 교재 258페이지를 넘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즉 인자가 성전이고, 그 성전에서 성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렇게 성전을 중심으로 인자가 성신을 보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자와 성전이 결합된 것이 어디까지 나가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3년 동안 일하신 것이 바로 인자와 성전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3일만에 다시 짓겠다" 라고 하시는 것은, "인자가 곧 성전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자가 성전이 되고, 또 그러한 성전에서 성신이 나온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렇게 되면,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성전이 되고, 또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렇게 아버지 안에 있는, 전혀 또 다른 세계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인간의 행함이 그야말로 완전하게 빠져버리는데, 오직 바람같이 부는 성령에 의해서 모든 일이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 니고데모야, 니가 바람을 아는가?

요한복음 3장에 나온느 니고데모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을 리가 만무한데, 그래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무엇인가? "예수님, 아니 어떻게 엄마 뱃속에 어떻게 다시 들어갔다가 나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키가 170cm이라면, 설령 그것을 17cm으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사고방식을 예수님이 너무 잘 아시니 뭐라고 하시는가? "육으로 난 것은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육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육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은 죽고 오로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바람은, 임의로 불어 !!

그러자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바람'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즉 "니고데모야, 니가 바람을 아는가?" 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바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바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바람은 임으로 부는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는 임의가 아니라 이미 확정된 것인데, 하지만 "십자가의 혜택을 누가 볼 것인가?" 라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임의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에서 나오는 성령의 임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십자가와 결합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예수님의 말씀은 '추방'의 의미를 !!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받는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믿지 못하도록 하는 '추방'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즉 쫓아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너는 이 동네에 오면 안 돼. 그냥 가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되돌려 보내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왜 모르는가? 그것은 바로 지금 교회가 "여러분, 얼른 나가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어서 어서 오세요" 라고 하니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가서 빈자리를 채워라" 라는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해서,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식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다 쫓아보내는 것은 아니고, 즉 "남들이 간다고 다 가는 것이 아니라, 너는 빨리 이리와. 너는 여기 있어야만 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냥 복음만 전하면 되지, "누구는 오고, 누구는 가라" 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그렇게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갈 놈은 가고 올 놈은 오는데, 하지만 그 결과는 바로 사도바울의 지적대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은 자기가 전도하는 그 현장에서 그것을 몸으로 체험했다는 말이다.

(행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씨부리지 마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즉 "글세, 제 말이 그것인데, 하나님은 몽땅 다 믿도록 하지 않고, 믿는 자는 따로 있고, 믿지 않는 자로 따로 작정을 해놓았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것이 아까 말한 안경비유(?)인데, 안경이 건방지게도 자기가 만년필이라고 불러달라고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터진 입이라고 해서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바로 구원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제가 안경인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말이다.

◈ 로마서에 왜 토기장이 이야기가?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보면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저는 한번 튀어보려고(?) 안경 이야기를 만들어서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와 같은 피조물에는 "어떤 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할 권한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그렇게 권한이 없으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지, 권한도 없으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고, 설치고 돌아다니느냐는 것이다. 권한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다시 강조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 중에서 그 누구라도 구원을 받을 만한 권한이 있어서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데, 순전히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한'은 그야말로 피조세계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인데, 오로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에 한해서만 주어진다는 말이다. 즉 주님의 권한에 의해서, 그냥 주님의 백으로 말이다. 자기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그러한 주님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했는데, 그런데 졸지에 구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그것이 전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줄 아는데, 즉 그것이 그들에게만 납득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자기 행함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258페이지를 보자.

** 새 왕인 다윗은 새 성전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살리신다. 새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왕이 자기 백성에게 분배해준 그 땅을 겨냥해서 충만하게 넘쳐난다. 새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에덴동산에서 지었던 죄가 이제 용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이제 용서의 중심지이다.

◈ 왜 계속해서 '다윗'을 이야기하는가?

여기에 보면 '새 왕 다윗은' 이라고 하는데,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면 되는데, 자꾸만 왜 다윗을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다윗이 아닌데 말이다. 선지서가 바로 이러한 형태를 지니는데, 이사야 7장에도 보면, '임마누엘' 이라고 하는데, '예수' 라는 이름을 놔두고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라고 하는 것이 더욱 더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서로 딱딱 맞아떨어지고 이해하기에도 좋다는 말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름 - 이런 식으로 활동함 !!

그러면 신약성경에서는 예언된 것과는 달리 왜 이름이 '예수' 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결코 사람들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대로 기능이 실천되는 용도라는 것이다. 즉 이름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의미대로 활동하게 되어있는 '활동성 이름(?)' 이란 것이다. 그러니 그 이름을 떼어버리고 "이런 식으로 활동함" 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것이 곧 이름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 라고 하는 말씀이 맞는데, 활동성, 즉 행함이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에게는 말이다. 그러한 활동을 압축시켜서 미리 알려주는 것이 바로 이름인데, 그러니 그 활동은 이름의 범주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활동이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예를 들어서, "예수님, 저에게 돈을 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전혀 '예수' 라는 이름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우리를 죄에게 구원할 자이지, 결코 우리에게 돈을 주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 산화머니님, 돈을 좀 ??

차라리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산화머니님, 저에게 돈을 좀 주세요" 라고 부탁을 하면, 그것은 말이 된다는 것이다. 산화머니는 대부업체니까 돈을 얼마든지 줄 수가 있는데, 물론 나중에는 무지막지한 엄청난 이자와 전화독촉을 당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원금과 이자를 내기 싫어서 예수님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 '예수' 라는 이름에다가 그런 식으로 돈을 달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름 자체가 바로 기능성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 이름의 의미도 전혀 모르고서, 그 이름이 활동하는 일과는 달리 다른 엉뚱한 것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는 우리는 먼저, 우리가 왜 악한 세대에 속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우리 몸은 안 되고, 즉 우리의 행함으로는 되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악한 세대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 세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말이다. 그것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려서 구원을 했다는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말씀을 드리지만, 이 '구원자'의 의미를 알려고 하면, "우리가 무엇을 행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함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예수님 덕분에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그 사람에게 의미로서 날마다 주어진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의미로서 말이다.

◈ 다윗 - 다윗언약으로 오시는 분 !!

그렇다고 하면, 이 '다윗'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을 의미하는데, 즉 '다윗언약으로 오시는 분'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시는 일은 바로 다윗언약대로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윗언약은 무엇인가? 제대로 된 왕 하나를 잘 섬기면 백성들이 덩달아 복을 받는데, 그런데 그 왕이 엉터리 짓을 하면 백성들은 그야말로 작살이 나는데, 그래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7만 명이나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왕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니까, 그 무서운 죽음의 사자도 물러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 나라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염병이 멈추고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왕 한 사람이 잘 하니 백성들이 혜택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이고, 다윗 통치말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즉 다윗이 마지막 때에 제사를 드려서 백성들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중에 솔로몬에게 자기 통치권을 맡기고 말이다.

(삼하 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 24:25)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 이제는 직접 제물이 되고 성전이 되는 왕이 !!

그 다윗이 했던 그 일 그대로, 이제는 완성단계에서 일을 하려고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새로운 왕 '다윗' 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분이 자신이 직접 제사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거룩한 장소가 되시는데, 바로 그분을 믿는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아하,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와 직결이 되는구나" 라는 점응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복음이 전혀 먹혀들지를 않는 시기이기 때문에 말이다.

왜 그런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마지막 때는 국가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잘 사는데, 안정감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그때는 예수님이 오실 기미도 별로 없고, 설령 온다고 해도 그렇게 반갑지도 않다는 것이다. 지금 그 정도만 해도 만족을 하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죄가 없기에 더 이상 에덴동산 같은 극락이 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성전에서 흘러 넘치는 생수로 땅과 기업은 기름지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린 4개의 강줄기를 끼고 있는 영토와 같다.

(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이제는 생명나무만 있어 !!

이 에스겔 47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은 마치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연상케 하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유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교재에 나란히 실어서 서로 비교를 하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한번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창세기 2장에서는, 이 강의 발원지가 바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이 선악나무는 이제 빠지고 생명나무만 12가지 과실을 맺는다고 되어있으니, 그러니 이제 선과 악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계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그에 반해서 에덴동산에서는 선악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으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정녕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다가올 천국에는 그런 죄를 지을 만한 건더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나무자체가 아예 없으니 말이다. 그저 은혜로만 주시는 생명나무만 있기 때문에, 즉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모르는데, 죄를 짓고 싶어서 환장을 해도 죄를 지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천국에 가지 않은 지금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성도에게는 죄를 지을 그때 그때마다 용서로 덮어지니, 죄가 있을 남아있을 틈이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죄를 수가 없다 ??

제가 어느 글에서 다음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인간은 죄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죄가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말이다" 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이 죄를 지으려고 하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미 어떠한 상태에 놓여있는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즉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인데, 그러니 내가 선을 포기하고 악을 행해야지" 라고,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아예 없고, 그냥 무조건 죄 쪽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59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과 죽음의 근원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여 그 원칙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직접 사람과 만물을 살려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었던 세계였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여기에 참 괜찮은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만드셨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원리에 인간을 참여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원리가 무엇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창조하신 원리라는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참 중요해서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원리에 참여시키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그 원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생명이지, 결코 선악과가 아님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 여기는 건물의 핵심부이니, 앞으로 잘 관리해 !!

예를 들어서, 사장이 어떤 사람을 임시직으로 뽑았는데, 그 사람은 자기를 그냥 건물 앞에 있는 정원이나 관리하도록 일을 시킬 줄 알았는데, 그런데 사장이 불러서 그 건물의 중앙 핵심부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는 말이,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회사의 정식직원인데, 그리고 이곳은 건물전체를 컨트롤하는 제일 중요한 에너지를 만드는 곳이니(혹시 보일러실?) 잘 관리를 하도록 해. 당신이 앞으로 관리를 잘하면 이 건물이 살고, 그렇지 않으면 건물도 죽는 거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맡겨두고 사장은 그만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장이 떠나고 난 다음에 다른 회사의 스파이가 한 놈이 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야, 저 코드를 뽑아. 사장이 뽑지 말라고 했지. 왜 그렇게 한 줄 알아? 저 코드를 뽑기만 하면, 니가 그만 사장이 되니까 그렇게 한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뽑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혹하는 그것이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뽑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만 건물에 에너지가 보급되지 않으면서 건물을 다 못쓰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이제는 마귀와 싸우는 새로운 인간이 !!

제가 든 예가 좀 썰렁했나요? 아무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참여시키는 것인데, 그 원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시는데, 그런 새로운 인간의 특징이 바로, 이상하게도 마귀와 싸우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드디어 마귀와 싸우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무엇이 부각이 되지 않는고 하니, 이 우주의 구조가 밝혀지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에덴동산에 심어지고, 또 마귀가 그 인간을 유혹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함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인간은 이제 이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구조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용이 조금 어려운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과 그 적이고, 또한 시편 110편 1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하는, 여기서 '주(主)' 라고 하는, 바로 이 '주' 개념이 싸우는 개념인데, 즉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라고 하는, 즉 주님은 원수와 싸우는 분이라는 말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목적을 알았지 싶은데, 이 우주의 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주의 원리는 바로 예수님이고 말이다. 즉 처음부터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교재 250페이지에 에스겔 11장 19절과 20절의 말씀이 있는데, 한번 살펴보자.

(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 11: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일치한 마음' 이란 무엇인가?

여기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라고 하는데,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일치한 마음' 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일치된 마음, 즉 동일한 마음은 없는데, 왜냐하면 각자가 살아온 환경이 다들 다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경험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일치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일치되고 동일한 마음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그런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뭔가를 마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서로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음을 낮추고 말이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

이렇게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라고 말이다. 사실 이것을 말만 들어도 끔찍한(?) 내용인데, 소위 성화를 주장하는 인간들에게 이것을 들이대면 다 넘어지는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것이 동일한 마음을 줄 때 비로소 가능한데, 그래도 우리가 온유하고 화평한 것은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몸의 컨디션이 최고일 때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자기에게 치통이라도 하나가 있게 되면, 온유함이고 뭐고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가장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알지만, 한 사람에게 고통이 있고 근심이 있으면, 그것이 온 가족에게 그대로 퍼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한 잔하고 와서 밥상을 엎어버리면, 아이들은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자기들끼리 또 싸운다는 것이다. 기분이 나쁜 것은 어차피 다 풀어야하니 말이다. 혼자서 살면 샌드백이라도 때리면 되지만, 그러나 같이 살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다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엄마, 저 아이를 자기 집으로 보내 !!

그래서 형제간도 없이 혼자서 사는 아이의 경우에는, 즉 엄마와 아빠와 자식, 이렇게 세 식구가 사는 경우에는, 그러고 보니 저희 집도 그러한데 말이다. 그런 가정에 친척 아이가 잠시 일이 있어서 얼마 동안을 머무른다고 하면, 물론 그 집의 아이는 처음에는 잘 지내겠지만, 그래도 부모와 학교에서 들은 것도 있고, 또 동생이니 잘 해주어야 하겠다고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를 못해서, 단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그만 난리가 나는데,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다 귀찮아하면서 친척 동생이 빨리 자기 집을 떠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자기 가지고 노는 것을 만져서 흠집을 내고, 잠을 자는데 코를 곤다고 하면서, 그렇게 불평을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자기는 자면서 이를 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니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라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한 것인데,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다 짜증이 나고 귀찮은데 말이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

그런데 한 성령을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복음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고문을 하는 것과도 같은데, 전혀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결혼을 하고, 하나가 되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정작 본인이 복음을 모를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런 것이 아니라면 결혼을 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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