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 신학의 문제점
몰트만 신학의 문제점
이름 : 조 규 현(IP:117.55.150.124)
한 주 전 울산의 서경수 목사님께서 몰트만의 신학에 대한 글을 복사하여 올려 주셨습니다.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간단히 저의 생각을 올려 봅니다.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Ⅰ. 몰트만 신학의 요약
몰트만 신학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희망의 신학
(1) 세계의 종말은 단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미 앞 당겨 일어났다. 마지막 죽음의 세력이 그의 부활을 통하여 깨어졌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파멸과 소멸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있다.
(2) 죄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계를 동요시키고 변화 시킨다. 종말론은 기독교의 한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형성한다. 종말은 그것이 희망이요, 앞을 향한 전망과 방향 정립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출발이요 변화이다.
(3) 성서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제는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을 일으킨다.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현실에서 정의와 자유가 있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해방을 일으킨다.
(4)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선취(先取)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현실 속에 나타나 보이게 됨을 뜻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 완성에 대한 ‘약속’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앞당겨 일으켜야할 하나님의 ‘전위대’이다.
2. 십자가의 신학
(1)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된 하나님의 인식과 신학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대한 회상은 연약한 피조물들의 고난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한다.
(2) 일반 신학에서는 십자가가 인간에 대하여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지만 몰몰트만에게는 십자가 신학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를 질문한다. 하나님은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의 피조물의 고난에 참여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연민의 하나님이시다.
(3)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할 때,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당한다.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죽음의 고난에 깊이 참여하는 동시에 아들로 구분된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성령 사이에 일어난 관계적 사건 곧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4) 십자가에 계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피조물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고난에 연민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사랑의 파토스(pathos)를 가진 자가 된다. 그리고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더 이상 있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기다리며 희망하게 된다.
3. 몰트만의 정치신학
(1) 국가종교로서 기독교는 사회의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지배계층의 편에 서서 사회적 특권을 누려 왔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회의 불의와 맞서 싸우며 구체적으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해방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였다.
(2) 구체적인 해방의 영역
1) 경제-공평한 분배의 사회
2) 정치- 자유 평등 인권의 신장
3) 문화- 인종적, 문화적 소외에서 해방. 서구문화의 우월주의의 극복
4) 자연- 자연 보호
5) 삶의 무의미에서 해방
(3) 하나님의 나라
명령과 복종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나누는 관계에 있다. 명령과 복종 대신 자발적인 봉사와 헌신이 있어야 하며,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제는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을 일으킨다.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현실에서 정의와 자유가 있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해방을 일으킨다.
이처럼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미래에 약속된 소망의 나라이면서도 이 땅에 부활의 믿음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이미 선취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땅에 이 세상의 약자들의 편에서 세상의 불의를 지적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Ⅱ. 몰트만 신학의 문제점
필자는 몰트만 신학의 세미한 부분에까지 비판할 여력이 없다. 다만 해방신학에서 주장하는 현실 인식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 현실 인식의 문제점
공산주의자들의 계급론에 의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양분하듯 해방신학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 정치적 사회 현실을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고통 받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현실의 질고에서 해방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가해자의 죄와 피해자의 고난을 동시에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고,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그날이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이 현실 세계가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만 구성되어 있는가? 가해자의 죄악 때문에 세상의 불행이 있는가? 인간의 노력으로 가해자의 죄악성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 이 땅의 모든 질고로부터 해방되는 평화와 질서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수 있을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각양 각색의 인류와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가난한 자 부한 자, 병든 자와 건강한 자 등등.....왜 이렇게 섞여 살고 있을가? 다만 성경에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롬11:32).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할 것 없이 죄악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어거스틴의 ‘예지 예정론’에서처럼 이미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미리 예지하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정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엡1:4)고 하셨다. 그리고 이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창3:15)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는가? 이 구조 속에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감히 해방신학자들은 현실을 양분하여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겠다고 하니 가관이다.
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의 문제
몰트만을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은 이 땅에 가시적(可視的)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주장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피해자가 당하는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해방신학자들의 주장이다.
마치 유대교의 메시아관과 같다. 인간이 구상한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켜 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볼품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 했듯이, 오늘의 해방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해방신학자들의 몸부림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칭의관, 구원관, 그리스도관 부활관 및 하나님 나라관이 비성서적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신학자들의 구원관에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는 있으나 무엇에로의 자유(freedom to -)는 없는 것 같다. 즉 현실의 고통과 질고에서 해방은 크게 강조하지만 결국 인생의 종말에 대하여는 확실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은 고통 받는 현실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녕이 깃드는 이상적인 나라의 생존일 따름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종말론적인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여기가 아니며(요18:36, 요17:14-15), 너희들이 있을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여 간다(요14:2). 그리고 그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너희들을 영접하러 온다(요14:3)고 하셨다. 바울 역시 이 땅에 받는 성도의 고난은 당연한 것이라 언급하였으나(빌1:29) 참 소망은 하늘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빌3:17-20). 이 세상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다(고후5:1).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신자의 믿음 안에 이미 선취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 실현될 가시적(可視的)인 세계는 아닌 것이다. 더욱이 성서는 이 땅에 실현될 정치적 사회적인 가시적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靈的)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씀하고 있다. (골1:13-18, 엡1:19-23, 빌2:9-10, 요17:2)
Ⅲ. 결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1: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