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
요셉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 (버려진 자의 역사 속에 놓여진 요셉)요셉은 이삭에 예언에 의해서 '주'의 개념을 보여야 될 인물이다.(물론 끝에 가면 이스라엘이 주가 되지만)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될 인물이다. 그래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구원이 '주'에 의해서 주도되고 종속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있다.창세기 25:23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예언 속에 그런 자가 주가 되어야 한다는 정신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면 '주' 라는 것이 무엇인가?'주'란 세상을 임의로, 자유 자재로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모두 주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물론 그 움직임의 방향은 야곱의 언약 대로이다.요셉의 환경 변화는 자신에게 내려진 꿈이 모두 어떤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 졌다는 것을 점차 알아차리는 것과 병행된다. 이 프로그램은 야곱을 주의 자리로 올라 세우는 것과 관련 있다.꿈이 요셉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는 의미로 받아 드려져야 한다. 꿈의 실현은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발현될 것이다. 요셉의 일생이 꿈의 실현 단계이다.하나님은 '주'라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애굽나라의 정치사를 요셉 일변도로 뒤바뀌게 하신다. 즉 요셉을 중심으로 하신다. 요셉이 없으면 유지되지 못하는 나라로 뒤바뀌게 하신다.요셉이 보디발의 집 노예로 갔을 때도 그 집안은 요셉 중심체제로 바뀌며 옥에 갇혔을 때도 감옥은 요셉이 실제적 주인 행세하는 감옥으로 바뀐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때에도 요셉이 중심이 되는 정치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야곱의 가족들에게 요셉이 '주'의 위치로 세움을 위한 사전 포석이다. 그런데 이런 요셉의 위상이 곧 야곱(이스라엘)의 위상으로 전환되는 이유를 나중에 요셉은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와 맺은 언약으로 인해 일이 이곳까지 온게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의 맺은 언약에 의해서 이런 상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에게 그런 일을 당해야 하고 또 복을 받을 자로부터 잊혀진 사람으로 되었다는 것은, 복을 주는 자가 복을 받을 자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주'의 자리에 등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평소의 요셉의 생각에 변화를 촉구하는 계기이다. 즉 '나' 라는 존재의 의의가 무엇이나이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모든 형제의 주가 되는 꿈을 주셨나 하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주'라는 위치가 신분 상의 위치가 아니라 역사 해석상의 위치라는 것을 알게된다. 즉 내가 국무총리가 될 때, 그 때사 비로소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의 해석자로서 주의 위치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역사의 해석자란 자기에게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서 옹립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가 되신 야곱의 언약자,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용으로 가능해 짐을 안다.요셉이 옥에 있을 때도 계속적으로 '주'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역사를 움직여 나가는 것이 황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꿈의 해석 자로서(역사의 진행을 아는 자로서, 앞을 내다보는 자로서 뽑혀 나온 요셉은 자신이 갖는 고유의 기능이 다 야곱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그런쪽으로 사용한다. 형제들의 반복되는 애굽 방문을 기화로 형제들 사고의 변화를 관찰한다. 야곱의 언약이 지닌 '섬김'과 '희생'의 정신으로 요셉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아버지 야곱의 바램이 형제들의 질투심으로 무산되지 않기를 바랬다.모든 인류 역사는 야곱과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에 의해 지속되는 것을 보요 주고 싶었고 그리고 그 와중에서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들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외면 당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요셉의 일생이었다. 인간의 사적인 야심과 무지로 인해서도 결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 지배가 방해받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토록 배척받는 인물이 역사를 제대로 내다보는 '주'의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주'로서 채용된 요셉의 고난은 모든 인간의 왜곡된 심성을 말해 준다. 잘못된 '주'의 개념으로 인해 참된 '주'가 핍박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꿈이 난데없이 찾아 든 것도 아버지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 때문이며 그 언약의 내용은 아버지 야곱의 정신의 나라가 전 세계의 주가 되는 나라가 된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세상 모두는 야곱과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요셉 자신이 증명해 보인 셈이다.자! 그러면 요셉이 당한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꼭 그런 식으로 종으로 팔려가서 감옥에서 구출되어 총리대신이 되는 절차를 거쳐야만 했는가? 예를 들어보자. 만약 애굽에서 행정고시가 있어 똑똑한 요셉이 응시해 장원급제하여 국무총리에 등극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요셉은 바로 왕 수하에 있게되고 요셉이 중심체제가 되지 못하며 창세기 45:8의 말씀처럼 바로의 아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왕이 요셉의 진정한 의미, 즉 세상의 진정한 주관자와 연관있는 인물인 것을 알 경우에만 요셉 중심체제의 정치 형태로 달라진다. 그리고 애굽나라 전체가 야곱 언약에 예속된다는 곳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요셉의 고난은 요셉 자신이 야곱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조치였다.언약의 성취가 어떤 특정 인물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요셉은 알아야만 하고 더 나아가서 '주'의 진정한 의미도 알아야만 한다.요셉이 형제들에게 추방당했을 경우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하게 누명이 쒸여져 옥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당했을 때, 여호와의 복을 받게 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자기의 신분의 상승과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분명히 자기가 꾸었던 꿈의 내용은 자신의 신분 상승이었다. 그런데 주로서의(자기 중심체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신분의 변화와 무관함을 알 때 이는 주되심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보낸 분이 주되심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자기의 아버지와 계약을 맺은 하나님이시다. 요셉 자기는 단지 그분의 심부름꾼으로 여러 형제들 중에 앞서 보냄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 결국 나중에 누가 진정 이 애굽의 주가 되기 위해서 오게 되었는가? 이는 자기 아버지 야곱이었다. 자기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주가 되기 위해서 자기는 그 분 앞서 보냄을 받았던 것 뿐이다. 복을 받은 자와 복을 받을 자로부터 팔림당하고 죄인으로 몰려서 고초를 야곱의 잃어 버린 아들, 그 씨로 인해 야곱의 언약은 회생되었다. 그래서 야곱은 말년에 애굽왕에게 축복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바로 '주'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버림 받았던 자가 오히려 버려진 자를 구원하는 역할을 위해 소위 '주'가 있는 것이다. '주'는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곱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주'인 것이다.역사의 해석이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위해 '주'가 되기 위해 요셉은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했다.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형제로부터 버림받아 이제 영원히 단절되었다고 여길 것이 분명한 요셉이 다시 자기를 버린 형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자기의 자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자리였기 때문이다.'주'에게서의 종속이란 막연한 신분상의 격차에 의해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정신에 의해서 종속된다. 타인을 잘 되기 위해 자신이 뽑혀 다닌다는 의식이 옥중에서 요셉에게 주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야곱의 가정을 구원할 '주'의 자리에 합당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의 의미를 알았다면 높은 자리에서도 타인을 위한 '주'로서 행세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창세기 25:23에 나타난 야곱에 대한 예언은 이렇게 야곱의 활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야곱과 전혀 상관없이 야곱의 잃어버린 자에 의해서 성취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참된 은총으로 야곱에게 장자의 자리와 만유를 지배하는 '주'의 자리를 확보한 근거로 주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