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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42) 교회(12)[교회론]

(12)

교회와 직분

(골1:25-29)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지난주에 우리는 ‘교회는 온전함(텔레이오스, perfect)를 향해서 (카타르티스모스)온전하게 되어져 가는 과정 속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그 삶을 신앙생활이라고도 부르고 나그네 인생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땅히 올바른 말씀과 올바른 성례와 올바른 권징, 치리를 행사함으로 교회의 멤버들이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어져 가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함을 성경을 통해 확인을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그렇게 온전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지어져 가는 길에 하나님의 방법이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지상의 교회라면 그 지상의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어떻게 정의가 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이미 결론은 내려졌지요? 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이 거룩하게 지어져 가야하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니 만큼 교회의 모든 직분도 역시 성도들의 거룩함을 위해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엡4:11-12)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그러한 직분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맞지요? 교회는 이렇게 온전함을 향해(perfect, 텔레이오스)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교회가 소유한 것을 새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잖아요? “새 신분, 새 운명, 새 지위“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데 굳이 새 생명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자라남“이라는 힌트가 그 단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자라남‘에 기여하는 것이 교회 자신이요 또 교회 안의 직분들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여러 종류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에 조직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라는 것은 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일이 된 유기체에 왜 조직이 필요한가? 유기체인 교회라는 것은 천상의 완성된 교회, 영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는 그 자체가 유기체는 아닙니다.
많은 가라지 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직 온전한 유기체로서의 삶을 배워야하는 이 광야 땅을 살아내야 하고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그들이 함께 모이는데 비가 오면 비를 피해야 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도 막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일손이 필요하고 그 일손들을 규모 있게 움직이는 리더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성도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에 있어서도 여전히 인간이 가진 한계 때문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들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그 일을 감당해 내기 위해서 조직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조직에는 직분과 직책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유다처럼 돈궤 맡은 자가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공동체에는 직분과 직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직분이라 함은 직무상의 본분을 말하는 것이고 직책이라 함은 직무상의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모두 완전하게 성화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왜 그러한 ‘질서’가 필요하며 왜 조직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는 영 우리와는 딴 길로 가고 있는 “프쉬키코스”도 있고 새 생명을 받기는 받았는데 지금 젖이나 이유식을 먹고 있는 “살키코스”들도 있고 성숙한 “프뉴마 티코스”도 있고 하기 때문에 조직과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면 금방 난장판이 되어버리게 되니까요? 왜 목사만 설교를 합니까? 집사들도 돌아가면서 설교해도 되잖아요? 왜 교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지요? 질서의 차원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뭐 대단한 것을 배운다고 신학교를 졸업해야 목사 안수를 줍니까? 질서의 차원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신학교 졸업한 가짜들도 얼마든지 많아요.
그러나 질서의 차원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목사 안수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안수도 꼭 안수 받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안수를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꿈에 계시를 받고 와서 “하나님이 오늘부터 나더러 목사를 하라고 그랬다”하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안수 주고 설교시키고 할 거라고요.
그러면 개나 소나 다 목사 되고 성경 가르치고 그렇게 되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질서의 차원에서 조직과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러한 교회 공동체의 직분과 직책은 모두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한 직분과 직책이 조직체의 ‘운영’으로 초점이 맞춰지면 안 되는 거예요.
교회는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 안에서의 직분과 직책이 세속적 교회들이 추구하는 훌륭한 운영, 이윤이 남는 운영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교회의 직분 자들은 모두 세상의 전문가들로 구성이 되는 것이 제일 이상적입니다.
정말 교회의 일이라는 것이 그런 세상의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잘 되어가던가요? 대학교수님들이 주일학교 교사 잘하는 것 보셨어요? 성악가들이 성가대에 들어가서 그 성가대가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셨습니까? 훌륭한 CPA가 교회의 재정을 맡으면 교회의 재정이 훨씬 좋아지나요? 교회의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직분 자들의 조건을 제시할 때 그들이 가진 능력을 논하지 않습니다.
(딤전3:1-13)
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에피스코페스, 내려다 보다, 돌보다-목사나 장로 그리고 그 밖의 사역 자)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인색하지 않으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 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교회의 직분 자들은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술을 즐기지 않고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 어디 ‘교회의 직분 자는 돈이 많아야 하고 경영 능력도 있어야 하고 추진력도 있어야 하며 머리도 좋아야 한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교회의 직분 자들은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 결코 교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해서 훌륭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직분과 직책이라는 것이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교회 안에서 제일 중요한 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을 온전하게 만들어 천국에 데리고 가고 싶으셔서 하나님께서 소모품으로 세우신 것이 바로 직분 자입니다.
목사가 그렇고 장로가 그렇습니다.
안수 집사가 그렇게 사역자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모되어져 가면서 그 직분을 통해 직분 자 자신들도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이라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목사, 장로, 어떤 부서 팀장, 어떤 부서 회장, 부회장 이런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을 만한 능력이 있어서 앉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앉혀놓지 않으면 그나마 신앙생활도 잘 하지 못할 사람들을 앉히시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목사를 시켜놓지 않으면 절대 주일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목사를 시켜서 꼭 붙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은데 꼬박 꼬박 주일을 챙겨요? 제가 목사가 아니면 무슨 이유로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면서 성경을 공부하겠습니까? 보고 싶은 영화, 소설, 뮤지컬, 콘서트,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요.
전 절대 그렇게 제 자의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자식 성경은 읽혀야겠고 다른 것은 몰라도 주일정도는 지키게 해 주시려고 목사를 시켜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저의 목사라는 직분은 저를 거룩하게 만들고 아울러 저의 그 직분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직분입니다.
여러분은 목사 안 시켜도 신앙생활 성실하게 하실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교회의 직분이 교회의 계급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 밑에 장로, 장로 밑에 집사, 집사 밑에 평신도 그렇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거룩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서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연결되어 가는 형제자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사, 장로, 집사 다 없애 버릴까요? LA에도 그런 교회 있지요? 그 교회에는 목사만 있어요.
그럴 거면 목사는 왜 있습니까? 우리도 다 없애 버릴까요? 어떤 분들은 “교회는 직분 자들 때문에 망했다“고 폭언을 서슴지 않으시면서 ‘목사 장로 집사 제도를 없애자‘라고 분개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별로 그렇게 좋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그런데 왜 직분 자들이 필요하지요? 교회의 거룩을 위해 필요하다니까요.
그렇게 실수 많고 흠 많고 여물지 않은 직분 자들의 실수와 실패로 본인들이 큽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신자들이 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여러분이 보시기에 엉터리 같아 보이는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무슨 일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직분 자와 신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거룩을 향해 지어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재정 운영을 잘 못해서 교회 전체가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당사자와 교회의 멤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배워야 할 뭔가를 배웠으면 되는 거예요.
집사들이 담합을 해서 엉터리 같은 목사 데려다가 부흥회를 했어요.
그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진짜 교회가 “참 세상에는 가짜들도 많구나.
” 라는 것을 배웠다면 그것은 “잘 한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만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거 야무지게 배워서 졸업학점 채우면 하나님께서 불러올리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가 한 일을 가지고 평가를 합니다.
그것을 성과주의, 세속주의라고 합니다.
보리 고개를 없앤 박정희 대통령, 소 한 마리 팔아서 자수성가한 정주영 회장,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 이등 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이런 식으로 그들이 해 놓은 일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해 놓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놓는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7:15-23)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분명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그 열매는 자기가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그 좋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이런 열매는 아니다‘라고 21절부터 확실하게 첨언을 하십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열심을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궁금하지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인가?)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분명 무언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지옥으로 떨어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뭐가 잘 못된 것이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 나쁜 일입니까? 아니죠.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사도들이 행했던 일들 아닙니까? 분명 행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똑같은 일을 한 어떤 사람들한테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사도들이 행한 행함과 그들이 행한 행함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바로 다음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마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한 일 그러니까 예수를 알고 복음을 알고 행한 일은 좋은 열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한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복음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 행한 행함은 모두‘지옥에 들어갈 일’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고 난 뒤에 그것이 ‘자기의 열매’가 되어서 자기 자랑이 되고, 자기 의가 되어서 주님 앞에 가서도 저는 “이러 저러한 일을 분명히 했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제시를 하는 자는 따 가짜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고도 그것을 자기의 자랑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은 사람들은 오히려 지옥에 들어갈 범죄 행위를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자칫하면 열심히 해 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결과가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자신 없으면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상책입니다.
(눅17:7-10)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 지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무슨 일을 하고도 전혀 생색을 낼 수 없는 무익한 종으로 일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전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전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의 심판 때 양들이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의 자랑을 삼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25:31-39)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너희가 이러저러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천국에 보낸다.
‘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갸우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했지?‘ 전혀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우리의 ‘행할 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양들이 한 일이 전부 어떤 일입니까? 우리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동참한 일이지요? 우리 주님이 주리셨을 때 주님께 음식을 드리고 우리 주님이 목마르실 때 주님께 물을 드려 마시게 하고 우리 주님이 나그네 되셨을 때 주님을 영접하였고 우리 주님이 벌거벗으셨을 때 옷을 입혔고 우리 주님이 병드셨을 때 수발을 했고 우리 주님 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가서 뵈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 성도들이 행해야 할 일“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교를 해서 5,000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 보자고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5,000명이 돌아 온 것이 아닙니다.
그건 어차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선교에 참여한 사람들이 선교활동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온유한 심령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병이 나은 것을 열매라 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이 그 병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과 생명의 부질없음과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사업을 잘 꾸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자로서 뽄떼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사업이 망했어도 하나님으로만 기뻐할 수 있는 그 그리스도인의 희락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요, 직분 자들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함 같은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환난이 없이 어떻게 인내를 배웁니까? 고통이 없이 어떻게 하늘의 희락을 깨닫습니까? 훈련교관이 없이 어떻게 온유함을 배웁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러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매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지불식간에 조금 씩 조금씩 맺혀지기 때문에 양들이 나중에“우리가 언제 그랬어요?”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들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에 의해 맺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나무인 예수님께 붙어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일을 절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일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 일들을 통해 나를 만져 주시고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며 내 안에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배반을 당하고 때로는 멸시를 당하고 때로는 수치를 당하면서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맺으시는 열매가 맺혀진다면 그 삶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나 같은 인간은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시키셔서 이렇게 열매를 맺어가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 이게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벨이 어떤 보상을 받았습니까?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노아가 심판 전날까지 무슨 보상을 받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만 되었지요? 바울을 비롯한 우리 사도들이 예수를 믿고 어떤 보상을 받았습니까? 죽도록 두들겨 맞기만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받았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거룩을 따라 우리도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으로 가는 길은 오히려 고난이요 환난이요 핍박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환난을 당하느냐? 기뻐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도 여러 직분 자들이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명심하십시오.
그 직분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교회의 온전함을 위해 쓰여야 하며 자기 자신의 거룩을 훈련하는데 쓰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직분이 하는 일은 절대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때로 그 직분으로 인하여 고통스럽고 외로운 일을 겪게 된다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잘 참아내십시오.
그리고 나의 거룩을 위해 그 일에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나는 나의 자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형제자매들의 온전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자신을 드러내지 마시고 남을 높여 주시고 많이 들어주시되 말을 많이 하지는 마십시오.
불평불만을 공론화 시키지 마십시오.
우리는 불평과 불만이 생기게 되면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 그 불평불만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놓고 기도를 하기로 한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뒤에서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가집니까? 거기는 두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난 그래서 거기 참여 안 할 거야’라는 불참에 대한 변명이거나 ‘난 그럼에도 참여 한다’라는 교만한 마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제발 좀 더 성숙해 지십시오.
그런 불평과 불만은 전염이 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으로 다른 형제자매의 신앙에 악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논쟁은 지면 억울하고 이기면 원한만 남기는 것이 논쟁입니다.
각 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만 열심히 하세요.
자기의 거룩만 열심히 챙기십시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표어를 하나 지었습니다.
아마 제가 은퇴할 때까지 우리 교회의 표어로 쓸 작정입니다.
“너나 잘해” 여러분이 각 자가 맡은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면서 섭섭하고 불만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생길 때 늘 기억하십시오.
“너나 잘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참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게 될 것입니다.

45.교회(13)

교회!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엡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가 지난 번 수요 성경 공부 때 모든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네 가지 질문을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가 1)우주와 세상의 기원과 구조가 무엇인가? 2)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나는 누구인가? (What is man? who am I?)
3)인간과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가 무엇인가? (What is our problem?)
4)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What can we do about it?) 이 질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당면한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의 해결책을 나름대로 내 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들이 바로 종교이며 이념이며 사상입니다.

춘추 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는 인간의 문제를 예의 결여로 보았습니다.
임금과 신하간의 예가 결핍이 되어 끊임없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또 부자간의 예와 형제간의 예와, 사제 간의 예와 이웃 간의 예의 결핍으로 인간 세상이 이렇게 평화를 잃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간이 당면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수기(修己) 치인(治人)”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습니다.
유교에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수양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사덕 오상”이라고 해서 “인 의 예 지 신“입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서는 항상”삼강 오륜”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삼강은 “부위자강”(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군위신강“(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부위부강”(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오륜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 “붕우유신”(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강오륜에 입각해서 대인관계를 가지게 되면 평화가 온다는 것이죠.
이렇게 잘 살아내면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것이 유교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미 BC3 세기경에 위만 조선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가 전래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2,000년 넘게 유교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이 “예의 문제”입니까? 우리 힘으로 그것이 되던가요? 이 유교가 가장 폭 넓게 전파되고 나라의 국교처럼 되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조선시대입니다.
예가 가장 강조되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가장 많은 내분을 겪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었던 중국의 왕조도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당파 싸움과 피 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점철된 나라입니다.
그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석가모니)는 우리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힌두교 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힌두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나 철학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 힌두교는 창설자도, 선지자도, 교리체계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다산과 성장에 관심을 두고 사는, 타락한 인간들의 생활양식이 종교화 된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고통과 행복과 선과 악 같은 것들은 모두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는 브라만 이라는 진리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그 브라만 안에는 고통과 행복과 선과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인간 세상에 투영이 되면서 인간들이 그 현상들과 사건들을 고통으로, 행복으로, 선으로, 악으로 느끼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인간의 감정들은 다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가짜 느낌에 속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브라만 안으로 자신을 일치시키라는 “몰아 일체”의 사상이 힌두교의 가르침입니다.
“무념무상” BC600년경에 그 힌두교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개혁 힌두교가 나왔습니다.
그 하나가 “마하비라”라는 사람이 창시한 “자이나 교”이고 다른 하나가 “고타마 싯타르타”가 창시한 “불교”입니다.
이 두 종교는 개혁 힌두교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힌두교에서 희생제사와 카스트 제도를 없애고 불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불교나 자이나교 모두 그 맥은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이 처한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오각성(大悟覺醒)” “견성(見性)오도(悟道)”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반야심경”이라는 것을 한 두 번씩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관자재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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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현상은 “공”"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반야 바라밀“ 지혜를 얻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원은 이렇게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은 윤회와 환생을 통한 업보로도 구원에, 즉 불교 용어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업보라는 것은 “카르마” 전생에 지은 악행을 이생에서 갚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서 그 업을 하나하나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대오각성을 하게 되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인간의 문제가 깨달음에 의해 해결이 되나요? “우리가 겪는 모든 악과 고통은 다 허상이라는 것만 깨달으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세 번째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자연주의를 한번 생각해 보지요.
자연주의는 무엇을 자연주의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의 근본은 물질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물질은 영원 전부터 어떠한 모양으로든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과 역사는 점점 더 발전하고 진화해서 마침내 유토피아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자연주의입니다.
거기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해서 도움을 준다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역사를 운행한다거나 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의 맹신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그 자연주의가 본 인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아직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평화를 못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교육하고 더 많이 훈련시키고 더 많이 노력하면 분명 유토피아는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면한 고통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연주의 시대정신의 정점에 있는 아주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칼 마르크스에 의해 주창이 되었던 이데올로기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뜻 생각하기에 공산주의는 물질주의와는 아주 반대되는 이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산주의야말로 물질주의, 자연주의의 정점에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독일 국교회 목사님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루터 교 목사님이셨고 아버지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도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생 시절에 그가 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 관한 논문은 유명합니다.
그는 천재적인 철학자였고 사회학자였습니다.
헤겔과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는 청년 헤겔학파들의 모임인 “박사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정반합이라는 것은 어떠한 이론이 나오면(these) 언젠가 그에 대한 반대 이론이(anti these) 나오게 되고 그리고 양쪽을 적절히 수용하는 합의(syn these)결과가 도출된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합”은 “정반”의 결점을 털어 내고 장점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역사관은 바로 이 정반합 역사관입니다.
어떠한 시대정신이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다보면 반드시 그 시대정신에 반하는 시대정신이 나오게 되고 그 두 시대정신의 장점을 모두 품고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의 발전,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역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려운 말로 변증법이라고 하지요.
칼 마르크스는 헤겔로부터 이 변증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엘 바하로부터는 유물론을 배웠습니다.
포이엘 바하는 인간의 존재를 인간이 먹는 것으로 정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Human is what he eats" 잘 본거죠.
타락한 인간들이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는지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입니다.
포이엘 바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타락한 인간은 전부 자기 먹을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삽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들을 잘 생각해 보세요.
어른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뭡니까? “식사 하셨어요?” “친구들에게 흔히 하는 인사가 뭐죠?” “언제 밥 한번 먹자” 자기의 경제 상태나 상황을 남에게 말할 때는 “먹고 살만 합니다” 그러죠? 타락한 인간은 이렇게 전부 먹는 것, 자기 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이엘 바하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 먹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포이엘 바하는 종교를 정의하기를 “종교는 한계 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였던 포이엘 바하는 생각하기를 한계상황에 봉착한 인간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많은 물질을 생산해 내야 하는데 종교에 심취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물질을 창출함으로 그 한계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전부 신에게 매달려 자기들이 할 일을 게을리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민중의 악이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철저한 물질주의자인 포이엘 바하는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에게 나약하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어리석고 무지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헤겔에게서는 변증법을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엘 바하에게서는 유물론을 배운 칼 마르크스는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인 “공산주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에 등장하는 시대정신 대신에 “경제“와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계급“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경제와 계급의 정반합에 의해 발전해 간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를 보면 역사가 이렇게 발전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민주사회, 미래(또는 현대)공산사회 원시 시대에는 계급도 없고 경제적 불균형도 없는 공산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가 되는 사회였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직업이 분화가 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다스리고 착취하는 어떤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계급이 생기게 되면 하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되고 그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다시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고 그리고 또 다른 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계급의 정반합을 역사의 발전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의 진행과정을 “계급투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잘 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는 계급사회를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의 약점은 점점 부가 소수의 계급에게 편중이 되고 노동자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게 마르크스가 본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정확하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점 그렇게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상위 1%의 계급을 위해 나머지 99%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 봉사하는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증가하게 되지요? 그로 말미암아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은 점점 늘게 되는데 부가 한 쪽으로 편중이 되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살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재화의 수요가 줄어들겠죠? 상품의 수요가 줄어들면 당연히 실업이 늘어나게 됩니다.
밥을 굶는 자식들을 위해 한 조각 빵을 훔친 사람들이 감옥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 한 쪽에서는 수 억 원 짜리 물방울 다이아가 매진이 되는 그런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빈곤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성과의 대부분은 자기 위의 계급인 부르주아가 가져갑니다.
그래서 빈부의 차가 점점 심화됩니다.
그 빈곤의 악순환을 무엇으로 깰 수 있지요? ”혁명“입니다.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밟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프롤레타리아는 숫자가 많기 때문에 그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 성공을 해서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면 부가 공평하게 분배가 되고 이 땅은 다툼과 시기와 경쟁이 없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공동으로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에는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단결해서 뭐 하라는 거죠?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6.25를 전후해서 공산당들이 왜 지주들을 그렇게 죽창으로 처참하게 죽였는지 아시겠지요?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을 이렇게 예찬합니다.
“혁명을 통해 세상이 바뀌면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어서 생산물은 계속해서 많아지고 또 부를 손에 쥐고 있던 일부 소수의 계급이 없어지게 되므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그런 사회, 경쟁과 투쟁과 악재가 없는 그러한 지상 천국이 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공산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을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쟁과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사는 그러한 인간군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 마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에 성공하고 지배계급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프랑스 대혁명의 성공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에 더욱 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전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말기부터 조선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너무 좋으니까요.
이 이론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가난한 지식인들이 거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가 읽었던 조사가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유럽의 정부들은 절대 왕정과 공화정을 막론하고 그를 추방하였고 부르주아들은 보수파와 급진파를 막론하고 날조된 비방을 그이게 가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미줄처럼 옆으로 밀쳐 버리고 무시해 버렸으며 오직 어쩔 수 없는 경우에나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시베리아의 광산 노동자들로부터 유럽 전체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수백만 혁명 동지들의 존경과 사랑과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적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 실제로 칼 마르크스는 방법을 잘 못 선택했던 사람이지만 그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인간의 문제를 가난과 물질적인 궁핍과 계급의 갈등으로 보았습니다.
그것만 없어지면 인간은 그들이 갖고 있는 탐욕과 경쟁과 갈등의 문제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마르크스가 놓친 게 뭡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자기를 죽여 남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계급투쟁으로 옛 계급을 몰아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위 계급이 나타납니다.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이 그들 아닙니까? 그들이 정말 새로운 사회주의 적 인간이 되어서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사람들인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의 문제가 정말 돈과 물질의 부족과 계급의 갈등에서 오는 것입니까? 만일 그 것이 사실이라면 공산주의도 하나의 구원의 방법일 수 있지요? 예수가 왜 필요합니까? 돈만 충분히 주고 공평한 사회만 만들어 주면 구원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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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국의 수많은 부자들이 정말 행복합니까? 대학 때 제 친구들 중에 그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요.
부모가 집 안 곳곳에 엄청난 현금을 감춰 두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빼다 쓰는데도 부모가 얼마가 빠졌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물론 환경도 좋았지요.
그런데 그 아이들 중 한 명은 자살했고요.
두 명이 마약 사범으로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인간은 그런 것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필요나 명예가 채워진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보세요.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아닙니까? 그 분들 지금 다 뭐하고 사세요? 혹시 돌 맞아 죽을까봐 지금도 경호원들 데리고 다니면서 삽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갑니까? 남들 눈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삽니까? 그 자식들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환경을 윤택하게 바꾸어 준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왜 한진, 두산, 현대, 쌍용 이런 재벌 그룹 자식들이 서로 형제간에 법정투쟁까지 하면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고 싶으시죠? 왜 가고 싶으세요? 만일 여러분이 천국 가시고 싶은 이유가 “거기는 나에게 너무나 좋은 집과 환경과 거처가 제공 될 곳이기 때문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건 너무나 가난한 소망입니다.
그건 자연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차 좋은 집 가져 보신 적 있으시지요? 아니면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을 가져 보신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그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오래가던가요? 물질과 재화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만일 천국이 그렇게 금으로 은으로 만들어진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만 한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서도 이내 싫증이 날겁니다.
싫증이 나는 곳이 어떻게 영원하겠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지 내가 원하는 환경이 제공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채워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구원관은 그렇게 물질적인 것입니다.

과학문명주의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과학 문명의 발달 뿐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과학문명이 더욱 더 발달해서 더 많은 재화의 생산이 일어나게 되고 인간의 질병이 극복이 되면 인간은 그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의 구원관은 무엇입니까? what is our problem?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combine되어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양식도 먹어야 하지만 영적인 양식도 먹어야 합니다.
그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양식의 공급 통로가 죄로 인해 막혀 버린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뚫려야 합니다.
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의 회복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허상이며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풍족한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과 화해 한 자로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살게 되는 초월 적인 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힘과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사는 한, 절대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세상의 종교와 시대정신과 이데올로기가 힘과 권력과 자기 자랑을 좇아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와 정 반대의 시대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구 경북 소위 TK가 힘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TV연속극에도 호남 사투리가 안 나왔습니다.
그 때는 호남 사람들이 마음대로 고향을 밝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연이 힘을 썼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는 호남 사람들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죠.
제가 미국에 오기 전에 국민회의라는 정당에서 잠깐 일을 했었습니다.
청년특위라는 곳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청년특위에 부산 출신인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선이 끝나고 청와대 비서실로 들어간 친구인데, 당시 청년특위를 관할하고 있던 분이 이름만대면 여러분도 다 아시는 당의 실세였습니다.
그 분이 첫 회의를 주관하시면서 돌아가면서 특위 위원들의 고향을 물어보셨습니다.
제 옆에 있던 그 친구는 분명 고향이 부산이었는데 “자네 고향이 어딘가?” 그러니까 “저 목포 옆입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걸 물어 본 분이 고향이 목표였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이 “그래 목포 옆 어디야?” 그러니까 “목포에서 배타고 3시간 거리입니다” “그래 거기가 어디지?” 그러니까 머뭇머뭇 거리면서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그냥 “부산“그러면 되지 왜 목포 옆이라고 그래요? ”목포에서 배타고 세 시간”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에 붙어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힘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피곤해요.
잘 들여다보면 참 우스워요.
정치인들 보세요.
무슨 정치 철학이나 소신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철이 바뀔 때마다 힘 있는 쪽에 붙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내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딤전4:6-8)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6:6-10)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딛2:11-14)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후2:9)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3:10-1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경건을 연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이라고 번역이 된 “유세베이야”는 “거룩”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힘을 좇고 명예와 권력을 좇아 그 것으로 나의 만족을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함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새 나라를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맛보며 또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마저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합니다.
남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주의자들이나 성공주의자, 물질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생활입니다.
(딤전6:5)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자기의 거룩조차도 자기 자랑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여러분, 이제 2006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새달 새해, 새 시간을 나누어 주셨을까요? 어차피 이날이 저 날 다 나은 것이 없고 다 같은 날인데 왜 이렇게 금을 그어주십니까? 우리에게 자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지난 2005년 송구영신 예배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 도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었지요? 한 해 동안 그 새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셨습니까? 한번 마음속에 펴 보세요.
대부분 망치셨죠? 구겨 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새 도화지를 받아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그 새 도화지에는 이런 그림을 그리세요.
우리 함께 유다서를 큰 목소리로 읽고 마치죠.
(유1:1-2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3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해서 편지를 써 보내려고, 여러 가지로 애써 준비를 해 왔는데 이제 여러분에게, 간곡한 권고의 편지를 쓸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이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4 어떤 침입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5 여러분이 이미 다 알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께서는 백성을 애굽에서 한 번 결정적으로 구원해 내시고서,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습니다.
6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7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몽상에 빠져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9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놓고 악마와 다투면서 논쟁을 할 때에, 차마 모욕적인 말로 단죄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만 말하였습니다.
10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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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 · 469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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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